켄 드라이든, 78세로 별세... 하키 영웅이자 캐나다의 거인
작성자 정보
- ekbs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356 조회
- 목록
본문
켄 드라이든 전 몬트리올 커네이디언스 골텐더가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몬트리올 벨 센터에서 열린 경기 전 행사에서
그의 등번호 영구 결번을 기념하며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여섯 번의 스탠리컵 우승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골텐더, 켄 드라이든이 암 투병 끝에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72년 서밋 시리즈에서 캐나다의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며 한 시대를 정의한 인물이다.
몬트리올 커네이디언스 왕조의 핵심 멤버였던 드라이든은 30대 초반에 선수 생활의 정점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커리어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변호사, 작가, 정치인, NHL 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는 캐나다 사회 전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1947년 8월 8일 온타리오주 해밀턴에서 태어난 드라이든은 토론토 교외에서 자랐다. 1964년 NHL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브루인스에 지명된 후 몬트리올로 트레이드되었고, 코넬 대학교에서 대학 하키 선수로 뛰었다. 이후 1971년 3월 커네이디언스에 데뷔해 그해 봄 곧바로 팀을 스탠리컵 우승으로 이끌며 플레이오프 MVP인 콘 스마이스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1971-72 시즌에는 신인왕인 칼더 트로피를 수상했지만, 팀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5개월 뒤, 그는 1972년 서밋 시리즈에 참가했다. 냉전 시대에 캐나다와 소련의 대결을 상징하는 격렬한 시리즈였다. 드라이든은 2022년에 출간한 회고록 <더 시리즈>에서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했다.
"몬트리올로 비행기를 타고 온 기억도, 경기가 있던 날도, 라커룸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1차전에 대해 썼다. "그저 계속 커져가는 감정만 기억할 뿐이다. 스탠리컵 시리즈를 앞두고 느껴지는 감정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다시 또 커졌다."
몬트리올 포럼에서 열린 1차전과 밴쿠버에서의 4차전 패배 후, 드라이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6차전에서 3-2 승리를 이끌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7차전은 토니 에스포지토가 선발로 나와 캐나다가 4-3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8차전, 마지막 순간 폴 헨더슨이 결승골을 넣으며 6-5의 짜릿한 승리를 거둘 때 드라이든이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 승리는 대서양 건너편 캐나다 전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2022년 캐나다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드라이든은 "그 대회의 역사와 그 팀의 유산을 모든 캐나다 팬들처럼 나도 강하게 느낀다"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좋은 와인처럼 말이다. 사실 그 유산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드라이든은 1973년 스탠리컵을 들어 올렸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 기 라플뢰르, 세르주 사바르, 래리 로빈슨 같은 위대한 선수들과 함께 네 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83년 출간한 그의 책 <더 게임>에서 NHL 최고의 골텐더에게 주어지는 베지나 트로피를 다섯 번 수상했던 그는 1978-79 시즌 한 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경기가 나에게 가까워지거나 위협적일 때, 내 의식은 멍해진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내 눈은 퍽을 쫓고, 내 몸은 움직인다. 골리가 움직이듯, 내가 움직이듯. 움직이라고 지시하거나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움직인다. 그리고 내 눈이 퍽을 볼 때, 나는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들을 본다."
스틱 위에 글러브를 얹은 특유의 편안한 자세로 유명했던 193cm의 골텐더 드라이든은 1979년 31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그는 이후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1973-74 시즌을 쉬면서 토론토의 한 법률 회사에서 실무 수습을 했으며,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1983년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그는 단 7시즌 동안 258승 57패 74무, 세이브율 0.922, 평균 실점 2.24, 46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놀랍게도 80승 32패를 기록했다.
은퇴 후 처음 쓴 책이 바로 <더 게임>이다. 이후 그는 커네이디언스 코치였던 스코티 보먼의 전기를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더 썼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의 구단주로 활동하며 팀을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 두 차례(1999년, 2002년) 진출시켰다. 2004년에는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사임했다.
2004년 연방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폴 마틴 총리 내각에서 사회개발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2006년과 2008년 총선에서도 당선되었지만, 2011년에는 낙선했다.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마지막 저서인 <더 시리즈>는 1972년 소련을 상대했던 선수들의 세계를 캐나다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그 순간에 문자 그대로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고 그는 50년 후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단순히 그 순간만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의 준비 과정까지 포함한다. 선수들 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2,200만 명의 캐나다인들 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반응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생생한 기억을 남긴 것이다."
몬트리올 커네이디언스의 구단주이자 회장인 제프 몰슨은 "켄 드라이든은 뛰어난 운동선수였지만, 훌륭한 사람이기도 했다. 마스크 뒤의 그는 실로 거인이었다. 우리는 오늘 하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조의 초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삶과 지역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가족, 사려 깊은 시민, 신사를 잃은 것에 슬퍼한다. 그는 이 구단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진정한 전설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켄은 몬트리올 커네이디언스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최고를 구현했으며, 우리 사회에 남긴 그의 유산은 스포츠를 넘어선다. 몰슨 가문과 우리 구단 전체를 대표하여, 그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그를 개인적으로 알 수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유족으로는 아내 린다와 두 자녀가 있다.